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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함양인의 구국사상을 재조명하다.

30일 함양문화원 제14회 학술회의, 의병장 노응규·진암 이병헌·의병장 문태서 등 활동 조명
인터넷함양신문 / 1551woo@hanmail.net입력 : 2018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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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함양인의 구국사상을 재조명하다.

30일 함양문화원 제14회 학술회의, 의병장 노응규·진암 이병헌·의병장 문태서 등 활동 조명

구한말 함양인의 의병활동과 유교개혁운동을 통한 구국사상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함양문화원(원장 김흥식)은 30일 오후 2시 함양군청 대회의실에서 문화원 회원 및 군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한말 함양인의 구국사상’을 주제로 제14회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주제발표에는 남재우 교수(창원대 사학과)가 ‘의병장 노응규, 기억과 기념’이라는 발표를 시작으로 최일범 교수(성균관대 유학대학)의 ‘진암 이병헌의 유교개혁사상 연구’, 그리고 박용국 교수(경상대 역사교육과)의 ‘문태서의 의병활동과 그 성격’ 등에 대해 각각 발표했다.

우선 남재우 교수는 “의병장 노응규는 서부경남지역에서 유생의병장으로서는 보기 드문 예”라며 “함양지역에서도 지역인물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인물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지역민과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인물연구를 통한 교육 활용 △인물기념을 위한 시설물 설치 △역사서 편찬 △역사인물의 스토리텔링 △지역인물에 대한 관심도 제고 등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응규 의병장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1896년 의병을 모집해 문인 정도현 등 참모진 8인과 별동부대 500명, 대포 4문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장악하는 데 성공했으며, 을사늑약 후 경부철도와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는 등 맹렬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07년 체포되어 옥중 단식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어 최일범 교수는 일제강점기, 유교를 종교로 승화시켜 부흥을 꾀했던 함양 출신의 유학자 진암 이병헌의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했다. 진암 이병헌은 서양의 종교와 문화 등에 밀려 날로 쇠퇴하던 전통적 유교를 종교화해야 되살릴 수 있다며 ‘공자교 운동’을 펼쳤던 유교개혁 사상가이다.

‘문태서의 의병활동과 그 성격’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박용국 교수는 덕유산을 중심으로 전라·경상·충청도 지역에서 크게 활약하며 덕유산 호랑이라 불리던 문태서 의병장에 의병활동 전개 과정과 그 성격을 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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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국 교수는 “그는 안민(安民)을 행동강령으로 한 의병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통감부 아래 노예적 삶에 놓인 조선인의 삶에 활로를 열어주었던 민족해방운동의 선도적 인물”이라며 “함양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연구와 지역적 확산의 노력들은 국가사 차원만이 아니라 지역사 차원에서도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함양군 서상면 출신인 문태서 의병장은 1906년 최익현과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지로 경남·전북· 충남·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약했으며, 6년간의 항일투쟁 끝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70년 건국공로 훈장에 추서됐다.

주제발표가 끝나고 2부 종합토론에서는 경상대 최석기 교수가 좌장으로 경상대 오세현 교수와 진주교육대 김낙진 교수,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원 전병철 교수이 토론자로 참석해 종합토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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