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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술(仁術) 펼치며 참 의학 정신 일깨우고 간 대각자(大覺者) 인산(仁山) 김일훈

평생 낮은 곳에 머물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인술(仁術)로 돌보았던 인산 김일훈(仁山 金一勳.1909~1992) 선생.
우인섭 기자 / 1551woo@hanmail.net입력 : 2024년 04월 18일

인산 김일훈 선생

인술(仁術)
펼치며 참 의학 정신 일깨우고 간 대각자(大覺者) 인산(仁山) 김일훈

평생 낮은 곳에 머물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인술(仁術)로 돌보았던 인산 김일훈(仁山 金一勳.1909~1992) 선생.

1909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에서 태어난 그는 생이지지(生而知之), 스스로 깨우쳐 알고 있는 사람 살리는 모든 비밀스러운 묘법을 생전에 밝혀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그들의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가리켜 가난한 이들의 의황(醫皇)이라 칭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인산 선생이 남기고 간 거룩한 뜻을 기리는 것은 병자 구제를 위해 일생을 바친, 물욕을 초탈한 청빈한 삶 때문이다.

1992년 봄, 선생은 일생을 통해 깨우치고 경험한 모든 비방(秘方)을 현세에 남겨둔 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선생의 활인구세(活人救世) 정신은 선생이 떠나신 이후 더욱 큰 빛을 발하고 있다.

대가 없이 참 仁術 펼친 민초들의 醫皇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경남 함양에는 하루 평균 150여 명의 난치병 환자들이 ‘지리산 도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대부분 암.백혈병.중풍과 같은 중증 질환을 앓고 있거나 그 가족 되는 사람들이었다. 함양에 수염이 텁수룩한 ‘지리산 도사’가 살고 있는데, 그를 만나면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병을 고치러 이름난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희망이 보이지 않자 용하다는 명의, 또 좋다는 약은 다 써본 그야말로 더는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지리산 도사’를 만나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지리산 도사’가 살던 곳은 열 평 남짓한 허름한 집이었는데, 집안은 늘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바깥 도로까지 멀리서 온 승용차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워낙 사람이 많아 도사를 만나려면 몇 시간이고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 때로는 밤을 새워야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 면담이 성사되어도 그 시간은 잠시였다. 

도사는 환자의 얼굴을 보고 몇 가지 묻고는 진맥이나 별다른 상담 없이 약화제(처방)를 불러주었고,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고 인근 건재상에서 약을 지어 돌아갔다. 

도사는 처방해 준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이 결코 없었다. 훗날 감사의 표시로 약소한 선물을 가지고 오면 물리치지 않았으나 과한 돈이나 처방의 대가로 내미는 돈은 집어 던지기 일쑤였다.

‘도사’는 돈과 인술을 맞바꾸는 의료기술자가 아니라 저마다 딱한 사연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살길을 일러준 ‘민초들의 의황(醫皇)’이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인산(仁山) 김일훈 선생이다.



평생 가시밭길 걸어온 독립운동가

인산 선생은 유의(儒醫)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모두 이름난 유학자이자 의학자였다. 

네 살 무렵 말과 글에 눈떴다는 그는 일곱 살 되던 해 비 갠 하늘의 오색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오(秘奧)’를 깨우쳐 자연물의 속성을 간파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할아버지를 도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인산은 16세 때인 1924년 가을 의주 읍에서 횡포를 일삼던 일본인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변창호 선생이 대장으로 있던 모화산 부대의 일원으로 항일전투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과 막노동, 병자 구료로 나날을 보내다가 1934년 봄 어느 날, 임무 수행차 철원으로 가던 도중 얼굴을 알아본 조선인 형사에게 붙잡혔다. 

발톱이 빠지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춘천 형무소에서 복역하는데, 1년 6개월 뒤 노역장에서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인산은 백두산, 묘향산 등지를 전전하며 막노동.사금 채취.채약 등으로 연명하면서 자연물의 약리 작용을 연구하는 한편, 가는 곳마다 인술을 펴 숱한 병자들을 구제하였다. 인산이 죽염을 최초로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민초들 속에 묻혀 구료 활동
인산은 광복 후 해방 정국을 주도했던 김성수 여운형 장덕수 김병로 김준연 등과 교유하면서 건국 운동에 잠시 관여하였다. 

그러나 좌우의 분열과 파벌 간의 극심한 권력 쟁탈전에 환멸을 느껴 정치권 인사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인산은 이승만 정부에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한의학과 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해 양한방 종합병원과 한의과대학을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풀을 뜯어 먹이고 쇠꼬챙이로 사람을 찌르는 것’도 의학이냐는 보건 행정 담당 미국 고문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로 인산은 정계와 완전히 결별하고 계룡산으로 낙향한다.

계룡산, 전북 남원의 운봉마을, 경남 함양의 살구쟁이 마을 등지를 전전하면서 글방 훈장, 산판 목물, 함지박 깎는 일 등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오핵단, 삼보주사와 같은 암 치료 약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60년에는 다시 서울로 이주하여 침과 쑥뜸 등으로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이때 인산의 신묘한 의술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장안에 묘향산 활불(活佛)이 나타났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가난과 고통을 자초했던 인산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한반도 자연물의 약성을 연구하고, 오핵단(五核丹).삼보주사(三寶注射)와 같은 전설의 신약(神藥)을 제조하는 실험에 몰두하였다. 

인산은 정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함지박을 깎는 목공 일로 연명을 하면서 시골의 촌로들 속에 묻혀 살았다. 

독립운동 시절 함께 고문을 당하고 일제의 총에 맞아 죽은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라 편히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인산은 항상 남루한 차림을 하였고, 심지어 한 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자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공해 시대 건강 지혜 남겨
인산은 이미 1970년대 초반 공해 독으로 인한 난치병의 증가를 예견하고 그 치료 대책을 세웠다. 당시에는 ‘공해’라는 말 자체가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았으나 인산은 그때 이미 화공 약 독의 오염이 가져올 재앙을 경고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1980년에는 암을 비롯한 현대 난치병의 치료법을 담은 『宇宙와 神藥』을, 1981년에는 역시 같은 내용의 『救世神方』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워낙 심오하고 난해하여 일반인에게는 거의 읽히지 않았다. 

77세 때인 1985년, 인산은 당신의 지혜를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세상에 널리 펴야 한다는 차남 윤세 씨(現 인산가 대표)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지혜와 경험의방(經驗醫方)을 구술하기 시작하였다. 

인산 선생이 틈나는 대로 쓴 원고에 선생의 구술을 받아 윤세 씨가 쓴 원고를 취합한 다음 다시 인산이 감수하는 작업을 5년여 진행한 끝에 1986년 6월 한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인산의 의학과 사상이 집대성된 『 神藥』이라는 책이다.



『神藥』이 발간되자 몇몇 잡지들이 책의 내용과 인산의 행적을 대서특필하였고, 난치병 환자들이 경남 함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잡지는 그 당시 인산의 자택을 ‘난치병 환자들의 종착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인산은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의 경험과 의료지혜를 세상에 모두 공개하겠다고 결심, 1986년 6월부터 전국 순회강연회를 시작했다. 

1991년 5월까지 30차례에 걸쳐 전국의 주요 도시 그리고 미국과 중국에서 인산의 신약신방(神藥神方)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 강연은 모두 녹음되었고, 훗날 그 전문이 『神藥本草』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인산 선생은 육신을 거두면서 자신의 지혜로 특허를 내지도, 자식에게 대물림하지도 않았다. 말한 그대로 책으로 엮어 사람들이 보고 익혀 누구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릴 방편으로 삼으라고 했을 뿐이다.

이러한 그의 뜻은 불멸의 저술인 『神藥>과 『神藥本草』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의료인도 약도 처방도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사람마다 부처가 되고 집집마다 법당이 되는, 다시 말해 사람마다 구세주요, 집집마다 성당이며 사는 곳이 바로 질병도 재난도 없는 극락이자 천당인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지상의 만물은 별들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자란다. 인산 선생은 어떤 별이 지상의 물질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꿰뚫어 보고 각종 신약(神藥)을 밝혀냈다. 그래서 인산의학을 ‘별의 의학’이라고도 부른다.

인산은 1992년 5월 19일 저녁 향년 84세를 일기로 차남 윤세 씨 댁에서 선화(仙化)하였다.
우인섭 기자 / 1551woo@hanmail.net입력 : 2024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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